“말이 안 나와요.” 실어증 환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 말 한마디조차 꺼내기까지, 몇 초의 망설임과 몇 분의 침묵이 필요하다. 그들에겐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전쟁처럼 어렵다.

의사소통은 인간다움의 본질이자, 세상과의 연결선이다. 말을 잃는다는 건 단지 정보를 주고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를 상실하는 것이다.

미국은 실어증과 같은 신경언어장애를 단순한 후유증이 아닌 장기적 회복이 필요한 만성 질환으로 본다. 이 철학의 전환점은 바로 ‘LPAA(Life Participation Approach to Aphasia)’라는 개념이다. 말을 다시 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삶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치료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했다.

이 관점에서 미국은 병원 중심의 단기 치료를 넘어, 지역 사회 안에서 언어장애인의 삶을 복원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미시간 대학교의 실어증 집중 프로그램(UMAP)은 만성기 환자를 위해 하루 4시간 이상, 2~4주간의 고강도 치료를 제공한다.

실어증 이후를 책임지는 사회 : 미국 언어재활 시스템이 주는 교훈 (리햅위더스 제공)
실어증 이후를 책임지는 사회 : 미국 언어재활 시스템이 주는 교훈 (리햅위더스 제공)
유현지 리햅위더스 대표(언어병리학 박사)는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치료가 끝난 후의 이야기다. 환자들은 지역 실어증 센터로 연결돼, 동료들과 매주 대화 모임에 참여하고, 지역사회 행사에서 발표를 하며, 스스로를 ‘환자’가 아닌 ‘말하는 사람’으로 회복한다"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은 의료보험 개편과 커뮤니티 네트워크, 전문치료사 교육이라는 세 축이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다.

유현지 대표는 "이에 반해 한국의 언어재활은 급성기 병원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문제는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대부분의 환자들이 언어치료와 단절된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의 회복은 오랜 시간과 반복 연습이 필요한데, 현재의 제도는 몇 주 안에 끝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가족은 매일 환자의 말을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부족하다. 치료사는 단기성과에 밀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고, 환자는 ‘이제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라는 생각에 입을 다문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유현지 대표는 네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언어재활을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삶의 권리 회복’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의사소통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누구나 실어증 이후에도 말할 권리를 가진다.

둘째, 급성기 이후에도 지속적인 언어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미국의 실어증 센터, 일본의 주간 보호소나 환자 모임 등과 같은 지역사회 기반의 치료 연계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치료사에 대한 지속 교육과 전문 자격 체계가 절실하다. 말실행증, 인지언어장애 등 복합 증상을 다룰 수 있는 고급 전문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임상 교육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진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환자와 가족이 함께 재활을 지속할 수 있는 ‘동반 시스템’이 필요하다. 가족도 훈련 대상이고, 지역 사회도 소통의 파트너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치료사가 가르치고 환자가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말하는 언어환경을 만드는 것이 재활의 본질이다.

유현지 리햅위더스 대표(언어병리학 박사)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말을 잃을 수도 있는 존재다. 그들을 위한 제도는 곧 우리 모두를 위한 안전장치다"라며 "말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치료’보다도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끊기지 않도록 제도와 사회가 함께 말 걸어줘야 한다. 지금 한국의 언어재활은 그 문턱 앞에 서 있다. ‘더 말하게 하는 나라’가 아니라, ‘끝까지 말할 수 있게 돕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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