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정의학과의원이상훈원장
삼성가정의학과의원이상훈원장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틀은 튜더 왕조(The Tudor Dynasty) 때 마련됐다. 튜더 왕조는 헨리 7세가 등극한 1485년부터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한 1603년까지로 120년 동안 지속됐다. 6명의 군주가 다스린 튜더 왕조 때 영국은 유럽의 2등국가에서 1등국가로 도약했다. 왕들은 중앙집권화, 관료화, 종교개혁에 성공하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는 잉글랜드의 내분인 장미전쟁을 결혼정책으로 종식 시켰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략결혼으로 나라의 위상을 높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헨리 7세는 큰아들 아서를 캐서린 공주와 혼인시켰다.

캐서린은 에스파냐의 공동 통치자인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의 딸이다. 그런데 아서가 혼례식 전에 사망했다. 이에 둘째 아들 헨리를 대타로 내세워 결혼을 성사시켰다. 또 큰딸 마거릿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의 배우자로 보냈다.

형수로 예정된 캐서린 공주와 혼인한 헨리 8세(1509~1547년)는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고, 웨일즈를 병합하고, 스코틀랜드를 영향권에 두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군사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 또 영국 성공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초석을 놓은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를 두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정략적 결합이었고, 결말은 비극이었다. 여섯 차례의 혼인을 하고, 2명의 왕비와는 이혼했다. 1명의 왕비와는 사별했으나 2명의 왕비는 간통과 모반죄를 씌워서 처형했다.

첫 왕비인 캐서린은 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모두 죽고 딸 메리만 생존했다. 왕자 집착증에 걸린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을 원했다. 그는 교황청에 “캐서린은 형인 아서와 결혼했다. 그렇기에 나와의 혼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혼인무효를 요청했다. 반면 캐서린은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와의 결혼이 무효이고, 헨리와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교황청은 캐서린의 입장을 옹호했다. 교황이 캐서린의 조카인 에스파냐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의 눈치를 본 결과였다. 분노한 헨리 8세는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을 선택했다. 교회가 왕에게 종속되는 영국 성공회를 만든 뒤 이혼했다.

그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과 재혼한다. 앤 볼린은 딸을 낳은 뒤 바라던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신생아는 곧 숨졌다. 헨리 8세는 그녀를 간통과 근친상간 죄목을 덮어씌워 처형했다. 네 번째 왕비는 초상화 미인인 클레베의 왕녀 앤이다. 영국 궁정화가가 독일을 방문해 그린 그녀의 초상화는 매우 아름다웠다. 헨리 8세는 독일 공국의 공주인 앤에게 청혼했다.

이 결혼에는 프랑스 국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견제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앤의 미모는 기대와는 달랐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선택하고, 결혼을 주선한 토마스 크롬웰을 처형했다. 헨리 8세는 17세의 어린 캐서린 하워드를 아내로 맞았다. 애교 많고 발랄한 소녀를 만난 그는 ”굴곡 많은 결혼사에 완벽한 여인을 보내 주신 신에게 감사드린다“는 기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이었다. 어린 아내의 과거를 안 왕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왕비 후보가 남자관계를 숨기면 반역이라는 법도 만들었다. 어린 왕비는 결혼 2년 만에 참수된다. 왕은 두 차례 남편과 사별한 30대 여인 캐서린 파와 혼인했다.

헨리 8세는 불행한 결혼사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비를 맞았다. 그의 변은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년이 된 그는 생산능력이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 왕비와 무난하게 4년을 살았으나 자녀는 없었다. 그런데 왕이 숨진 뒤 재혼한 왕비는 아들을 낳았다.

중년의 헨리 8세는 고도 비만에 시달렸다. 키가 188cm인 그의 체중은 143kg에 이르렀다. 정상 생활이 힘든 몸이었던 셈이다. 균형 잡힌 몸매에 잘생긴 지난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멋지고, 당당하고, 날렵한 몸매는 넉넉한 풍채에서, 다시 뚱뚱하게 변했다.

잦은 향락에, 식탐도 갈수록 심해진 탓이었다. 몸이 비대해지면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다. 혈액순환에 이상이 있었고, 허벅지와 종아리 염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성인병에 시달린 비만왕은 55세에 숨졌다.

헨리 8세는 근대 영국의 밑그림을 그리고,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왕이다. 유럽의 르네상스와는 구별되는 잉글랜드만의 독립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채택했다. 하지만 가정적으로는 실패했다. 만약 그가 젊은 날에 몸 관리를 잘했다면 어땠을까. 무고한 왕비들의 가슴 아픈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저작권자 © 헬스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