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타개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위를 계승한 찰스 3세 국왕의 음식 기호는 평범하다. 영국 왕실을 다룬 기록물 등에 의하면 그들은 생과일 주스, 계란반숙, 피망, 햄버거 등과 친숙했다. 반면 식도락가인 필립 공은 도요새 요리를 찾는 등 평범한 시민의 식성과는 달랐다.
영국의 왕은 정치 실권이 없다. 직접 정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자국민에 대한 영향력이 지대하다. 다른 나라 시민에게는 긍정적인 영국 이미지 메이킹에 엄청난 파급력이 있다. 영국 왕은 다른 나라 방문 시 상대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영국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조성하려는 외교 행위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1895~1952년)는 곳곳에 영국의 긍정 이미지를 심었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자메이카에서 흑인과 테니스를 쳤고, 남아공 방문 때는 흑인과 악수를 막는 경호원에 분노했다.
조지 6세의 외교 중 걸작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의 만남이다. 1930년대 후반의 유럽과 아시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팽창정책을 취한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제국주의 일본은 국제사회의 시한폭탄 뇌관이었다. 유럽 나아가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독일 등의 세력과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영국 프랑스 등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미 일본은 1937년 7월 7일 중국 침략에 나선 상태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전쟁을 일으키면 세계대전으로 비화 되는 극히 위험한 시기였다. 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기 1년 전인 1938년이다. 조지 6세는 조용히 캐나다 방문 그림을 그렸다. 전쟁 억제를 위한 노력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어선 구축 등 전략적 대응 논의 목적이었다. 이때 미국 정보기관은 조지 6세 계획을 탐지했고, 대통령 루스벨트는 영국 국왕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명목은 공식 일정 없는, 하이드파크라는 조용한 시골에서의 휴양이었다. 왕의 방문은 미국과 영국의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조지 6세는 “양국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이라며 초대에 응했다.
조지 6세와 루스벨트는 표면적으로 정치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둘에게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조지 6세는 캐나다 방문 시 집중될 관계국들의 시선 분산 효과를 생각했다. 실제로 조지 6세가 루스벨트와의 첫 만남 때 캐나다 수상 맥켄지 킹이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영국 미국 캐나다의 전략적 관심사와 향후 일어날 전쟁과 국제질서가 논의됐다.
루스벨트 입장에서는 국민들의 영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누그려 뜨려야 했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1차대전 때는 당초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 배에 탄 자국민들이 숨지면서 전쟁에 휘말리게 됐다. 시민민주주의, 대통령제를 택한 미국인들에게 왕정의 상징인 영국이 달갑지는 않았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미국 시민들 사이에는 반영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국제정세는 나날이 변했다. 루스벨트는 영국과의 군사 동맹 필요성을 느꼈다. 이를 위해서는 민심이 영국에게 우호적이어야 한다. 근엄함과 권위의 상징인 영국 국왕이 서민적인 행보를 보이고, 시민 민주주의를 인정하면 여론이 바뀔 것으로 계산했다.
마침내 조지 6세는 1939년 6월에 영국 군주로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조지 6세는 루스벨트가 설계한 그림을 수용했다. 루스벨트의 하이드파크 사저에서 벌어진 피크닉에 참석했다. 공개된 야외에서 소박한 식사를 했다. 평범한 시민과 같은 모습을 열연했다. 연회의 정점은 핫도그였다.
국왕 부부 앞에 낯선 음식인 핫도그 2개가 나왔다. 왕비는 먹는 방법을 물었고, 루스벨트는 “핫도그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받쳐서 입에 넣고 조금씩 씹어가며 드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왕비는 익숙지 않은 음식을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먹었다. 반면 조지 6세는 미국 시민들과 똑같이 손으로 쥐어서 입에 넣으면서 맛있게 먹었다.
조지 6세의 핫도그 식사는 영국의 왕이나 미국의 서민이나 음식에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평등하다는 메시지가 되었다. 핫도그 회식은 미국 시민들의 영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봄날의 눈처럼 사라지게 했다.
독일이 원조인 핫도그는 미국에서 서민 음식으로 꽃이 피었다. 또 핫도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미국의 연합국이 독일에 승리하는 실마리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 서민의 음식을 맛있게 먹은 영국 국왕과 이를 기획한 미국 대통령의 외교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은 핫도그를 1년에 평균 50개를 먹는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정 간편식으로 꽤 인기가 있다. 핫도그 스토리를 생각하며 먹으면 더 맛이 있을 듯하다. 다만 당분이 높은 핫도그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비만이나 고혈압 등 대사성 질환의 위험성도 높아질 수 있다. 따라서 가끔씩 별미로 즐기는 게 바람직하다.
(글 : 삼성가정의학과의원 이상훈 원장)
임혜정 기자
press@healthinnews.co.kr